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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 메이커(Peace maker)

이형근 판사(서울고법)

 

재판을 하면서 가슴 아픈 분쟁을 자주 본다. 평생 모은 전세금을 날린 세입자에서, 가족 사이의 재산 분쟁, 공사를 마치고도 돈을 받지 못한 공사업자의 소송까지 가슴 시린 사연이 많다.

 

분쟁의 마지막을 보면서 언제부턴가 분쟁의 시작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 마음 아픈 분쟁은 어떻게 탄생하여 어디를 거쳐 이 법정에 오게 되었을까? 확정일자를 받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유언장을 작성하는 작은 실천으로도 막을 수 있었던 분쟁이 많았다. 서면 작성을 번거롭게 생각하고, 믿고 빌려주는 법률문화에서 복잡한 분쟁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예방법학의 부재는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사건 수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합의사건 사물관할 기준이 1억 원이지만, 우리보다 소득이 높은 독일은 5000유로, 약 750만 원에 불과하다. 독일 사람은 민법을 적용받는 시민으로 생활하지 상법을 적용받는 상인처럼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돈은 은행에서 빌려 주지, 친구, 형, 이웃에게 믿음 하나로만 수천만 원을 빌려 주는 경우란 없고, 땅을 살 때도 법률가의 도움을 받아 정확한 계약서를 작성하며, 주요 거래에서 보험 장치로 위험을 분산하므로 큰 분쟁이 적다고 한다. 금융위기 속에서 유독 독일이 성장하는 요인으로 강한 제조업과 부패가 없고, 분쟁이 적다는 것을 꼽은 기사를 보았다. 예방법학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분쟁비용 측면에서 국가 경쟁력에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국에서는 피스 메이커(Peace maker)라는 애칭으로 예방법학이 발전하고 있다. 영수증 보관하기, 계약서 작성하기, 유언장 쓰기, 보험 가입을 생활화해 분쟁을 해결하는 관점이 아니라 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10년 이상을 판사로서 분쟁을 보지만, 때론 분쟁 자체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분쟁의 발생 원인이 더 마음 아프다.

하나의 분쟁이 해결되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동네 아줌마끼리, 공사 현장에서, 가정에서 서면을 작성하지 않고 웃으며 법률행위를 하는 작은 불씨가 새로운 분쟁을 잉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지금껏 분쟁을 해결하는 재판, 분쟁을 법정 아닌 곳에서 해결하는 조정에는 관심을 두었지만, 분쟁 발생을 줄이는 예방법학에는 관심이 적었다. 예방법학은 법률가에게 새로운 블루 오션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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